한말의 의사(義士)인이기윤의 시문집이다. 정현(廷賢)의 10세손이며, 익희(益熙)의 아들이다. 성주군월항면 대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장석영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석학으로 널리 알려졌 고, 특히 서도(書道)에 조예가 깊어 명성이 높았다.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장석영이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문안의 작성을 맡게되었으므로 그 초안 작성과 필역에 직접 참여하였다. 사림을 규합하여 독립청원서의 서명 활동을 전개하는한편, 자신도 서명코 자 하였으나 칠십 노모를 봉양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석영이 극구 만류하려 독립청원서에는서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직접 연루자로서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43년부터 1950년 3월까지전남 강진군에 정착하게 된 사유는 당시 아들 임재 (臨齋) 이인석(1914∼1999)이 강진읍 내 일본 회사인 큐슈(九州)중공업 강진농장에서 근무한 관계로 가족들이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학과 서예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유생(儒生)들을 대상으로 집 근처 연하동 초옥(草屋)에서 강학(講學)을 하였다. 이중에 경보(耕輔) 위삼량, 김정석, 마상덕 등이 대표적 유생들이라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장흥위씨 장천문중, 인천이씨 남면파종중 등 장흥과강진지역 각 성씨 문중 지도자들과 교유 하였다. 정부에서 농지분배가 시작되는 시점에 아들이 경북 경주로전근(轉勤)하게 되면서1950년 3월경 가족 모두가 경북 대구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장흥ㆍ강진지역 유생들과는 서신(書信)을 통해 유대를 유지하였고 왕래(往來)는 없었다고 한다. 특히 전국의 사우 150 개소의 편액 글을 썼다고 추정되며, 다수의 비문(碑文)을 찬(撰)하였다. 1971년 81세로별세 하였을 때 도포를 입고 머리에 갓을 쓴 전라도 장흥ㆍ강진지역 유생 7명이 조문(弔問)을 왔었다고 한다. 이들은관산읍 방촌리 태생 정헌(靜軒) 위계후(1905∼1982),졸헌(拙軒) 위계 본(1907∼1993), 용산면 어서마을 태생 화헌(和軒) 이대기(1905∼1974), 접정마을 태생 신헌 (愼軒) 이만흠(1906∼1976),강진군 군동면 쌍덕리 평덕마을 태생 경보(耕輔) 위삼량, 김정석과 군동면 삼신리 하신마을 마상덕 이다. 이 문집은 임재(臨齋) 이인석이 1980년대구에서 간행하였다.